학문을 익혀 성공하기보다 남을 이롭게 하라고 가르친 아버지

학문을 익혀 성공하기보다 남을 이롭게 하라고 가르친 아버지

호치민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80%의 시대였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을 침공하여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인도차이나를 건설하였다. 베트남에 진출한 프랑스인들은 자본주의 방식에 따라 대규모 고무 농장 등에 자본을 투입함으로써 베트남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자 했다. 불교와 유교에 바탕을 둔 공동 생산 방식을 존중하는 베트남인들에게 자본주의는 야만적이었다. 호치민의 아버지 응우옌 신샤크는 의식 있는 유학자였다. 일찍이 부모님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포방’이라는 베트남어 2급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래도 그는 식민지 관료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처의 죽음을 핑계로 조우에 대한 관직 임명에 응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인품은 아들 호찌민에게도 이어졌다. 호치민의 이름은 여러 명이었다. 유년시절의 이름은 응우옌 신쿵(Nguyen Sin Kung)이었고, 11세 이후의 이름은 응우옌 자오 타이인(성공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해외에서 일할 때 여러 가명을 사용했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한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애국자란 뜻)이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호치민이라는 이름은 1940년에 중국 언론인 행세를 하면서 쓴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을 바꾼 것이 베트남의 전통이었지만, 호치민은 항상 경찰의 추적을 받아왔기 때문에 가명을 써서 신분을 숨겼다. 이 다양한 이름들은 성공한 애국자 호치민의 삶을 상징한다.

호치민(11)은 그 후 응우옌(Nguyen)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아버지 밑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구 부웅 투쿠이(Buong Tukui)가 가르치는 지방 학교에 다녔다. 쿠이는 학생들을 고전에 감미롭게 하지 않고 유교 경전의 휴머니즘적 핵심을 전달하려 했다. 그것은 또한 학생들이 베트남의 독립을 옹호하도록 고무시켰다. 호치민은 그의 새로운 선생님 밑에서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조국을 잃은 슬픔으로 피가 끓어 넘치던 선생은 결국 학교를 휴교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떠나게 되었다. 소년 호치민은 아버지에게 돌아와 클래식 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중국문학을 공부하고 맹목적으로 공직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고전의 의미를 이해하고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호치민은 이 때의 유학 전보다도 <삼국지>나 <서유기>와 같은 옛날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았다. 호치민도 그에게 용광로 사용법을 배우고 그를 따라 새사냥에 나선 마을 대장부 지안을 좋아했다. 저녁때, 나는 지엔의 말을 들었다. 지엔은 독립투사들이 오랑캐를 몰아내려고 했을 때 이 이야기를 실현시켰다. 호치민은 민족주의자인 부엉턱 마우의 자살과 판딘 퐁이 군사를 잃고 이질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울음을 터뜨렸다.

호치민은 이웃에서 구할 수 있는 책 대부분이 베트남 역사가 아닌 중국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조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 성도 빈까지 걸어갈 정도였다. 그는 서점에서 베트남 역사를 공부하고 중요한 구절을 외워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호치민은 어린 시절 환경이나 혼자만의 역사적 소명을 키웠다. 이웃 마을에는 유명한 학자이자 애국자인 판보이 차우가 살고 있었다. 차우는 호치민에게 현대 일본을 배우기 위해 동유(동일본 유학이라는 뜻) 운동에 동참하라고 충고했다. 호치민은 일본인에게 기대는 것은 ‘호랑이를 현관 밖으로 몰아내어 뒷문으로 데려오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절했다. 만약 그가 그 제의를 받아들였더라면 호치민은 공산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우익 독립운동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호치민의 80%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용기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는 조심스러웠지만 확신이 들면 언제나 대담했다. 어릴 때도 그랬다. 반(反)세시위에 참여하여 한국학에서 제명된 후 결코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세계로 눈을 돌리는 기회로 삼았다.

1911년 6월, 프랑스 기선인 아미르 라투셰-트레빌은 유럽으로 떠날 때 고용되어 주방 보조로 탑승했다. 호치민은 ‘바'(위)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1919-20년경에 유로피안 양식으로 파리 시내를 걸어가는 호치민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1942년부터 1943년까지 감옥에서 쓴 식민지 학교 입학 요청서(아래 왼쪽)를 사용했다.

1911년 6월 마침내 그는 프랑스 기선 아미르 라투슈 – 트레빌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기 위해 베트남을 떠난다. 이제 호치민에게는 본격적인 여행 생활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어, 미국어, 영국어, 러시아어, 한자의 주인공 호치민이 맡았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주의를 선언하자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들고 직접 연합군 지도자들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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